파업 앞두고 둘째 태어나 졸지에 못난 남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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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년 만의 첫 파업, 전국언론노동조합 최연소 지부장, 못난 남편….' 16일 오후, 강진성 언론노조 경남일보지부장(사진)을 만났다.

지부 사무실(진주시 상평동 〈경남일보〉 사옥 3층)은 아직 '7일 파업(4~11일)의 열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2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하는 동안 수시로 조합원들이 찾아왔고, 그의 전화기도 무시로 울어댔다.

강 지부장은 파업 때 남은 '비타 500'을 건네면서 "민 기자님, 요즘 '때거리'(취재거리)가 없어 신가 보네요(웃음)"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파업 전후 이야기가 궁금했다.
"파업 전에는 황인태 사장이 편집권을 침해해도, 인사 전횡을 해도 노조에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합원들도 이대로 가다가는 경남일보가 정말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값진 성과는 부서 간 '마음의 벽'을 허문 점입니다. 일주일 동안 서로 부대끼다 보니 '동지애'가 절로 생길 수밖에요. 저는 이러한 힘들이 회사발전의 동력으로 활용됐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독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파업을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거든요. 더불어 파업 이후 유명무실했던 노조의 틀이 이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중입니다."

올해 서른여섯 살로 최소연소 지부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합원 모두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앞장서서 '총대'를 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대개 언론노조 지부장은 40대 초반에서 40대 중후반 사이에서 맡는다. "사실 조금 서글프기도 합니다. 지금은 한창 일을 배울 시기잖아요. 솔직히 맡은 일만 열심히 고민하면서 회사에 다니고 싶습니다(웃음)."

강 지부장은 스스로 못난 남편, 0점 아빠라고 했다. '파업'이 그를 그렇게 내몰았단다. 파업 결정이 서서히 가닥이 잡히던 지난달 26일(설날!), 둘째가 태어났다. 지부장을 맡지 않았다면 조금은 여유(?) 있게 아기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그렇게 하지 못했다.

파업 준비로 조직을 추스르고자 저녁에는 조합원들과 술을 마셔야 하는 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난 지 3일 만에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고. "'왜 하필 지금 아기가 태어나는 걸까?' 속으로 원망도 했죠. 아무튼, 파업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40여 명의 생계가 왔다갔다하는 상황이었거든요. 태어나서 이번처럼 부담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처한 상황을 아내가 이해해줬습니다. 만회를 하려면 셋째를 낳아야 하는데…. (웃음)"

화제를 돌렸다. 〈경남일보〉는 어떻게 들어오게 됐는지?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어요. 서울서 6개월 남짓 '카피라이트'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출·퇴근 길 전철에서 매일 '콩나물' 취급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게 회의가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고향인 진주로 와서 부모님이 하시는 페인트 가게 일도 돕고, 진주 MBC '정오의 희망곡'에서 보조 진행자로도 일했죠. 그런데 '전공의 피'는 못 속이나 봅니다. 대학 동기들이 방송 쪽으로 진출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언론 쪽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입사는 2005년 5월 19일 했다. '5·18' 바로 다음 날이라 또렷이 기억한다고 했다.

'카피라이트' 출신이기 때문일까. 입사 이후 줄곧 편집부에서만 근무했는데, 지난해 10월 사회부 소속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임단협 기간이라 기사는 쓰지 못하고 노조전임을 하고 있다.

"현장에서 열심히 발로 뛰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문제점을 들춰내고,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게 기자의 매력인 것 같아요. 저는 〈경남일보〉가 성공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기사만 나오는, (좋은 말로!) '여론주도층'이 보는 신문이 아닌 서민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우리의 신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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